국가의 핵심 권력을 가진 자들이 거주하는 안정적인 1지구부터 60년 전 일어난 12월의 폭동으로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땅 9지구까지 완벽하게 구획된 사회. 그러나 아날로그적인 통신수단이 주로 쓰이던 시절. 과거인지 미래인지 알 수 없는 시간대에 이 작품은 존재한다. 12월의 폭동 이후 9지구 후디 출신에서 1지구에 정착한 러너 영, 30년 동안 친구의 추도식을 변함없이 열어 주고 있는 문교부 차관이자 프라임스쿨 위원장을 맡고 있는 아버지 니스 영, 1지구 최고의 기숙학교 프라임스쿨의 모범생 다윈 영, 끊임없이 1지구를 비판하는 프라임스쿨의 아웃사이더 레오, 그리고 열여섯 나이에 9지구 후디에게 살해당한 제이 삼촌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는 루미 등.
루미는 4지구 출신인 엄마와 결혼해 7급 공무원 서기직에 만족하며 사는 아빠 조이 헌터를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늘 프리메라 여학교 교복으로 자신을 드러내길 좋아하고, 위대한 사진작가 해리 헌터의 손녀이자, 프라임스쿨에 입학하고도 그 학교에 가지 않은 제이 삼촌의 조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9지구 후디의 강도 침입으로 열여섯의 나이에 살해당했다는 제이 삼촌의 죽음은 루미가 보기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그날 새벽 아빠는 삼촌 방에서 말소리가 들렸다고 진술했는데, 뒤에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고 진술을 번복했다. 그리고 방에서 없어진 거라곤 단지 사진 한 장으로,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12월의 폭동을 기록한 사진들 중 하나다. 루미는 사라진 사진 한 장에 사건의 열쇠가 있다 생각하고 이를 파헤쳐 나가는데…….
귀여움 속 귀엽지 않은 이야기
초반엔 좀 지루한가 싶었는데 뒤로 갈수록 재밌어졌다. 사실 보면서 다윈이 니스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거라는 건 내심 짐작이 됐는데 난 그 대상이 루미일 줄 알았지 설마 레오일 줄이야...
레오는 작중에서 유일하게 사람의 죄는 영원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소설의 끝 직전까지도 제이 헌터 일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죄가 밝혀지는 자리에 있었다고 해서 죽게 되다니. 다윈이 솔직하게 밝히고 비밀을 지켜줄 것을 빌었다면 레오는 그렇게 해줬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더 안타깝다. 레오는 사람의 죄는 뉘우칠 수 있다고 믿으며, 다윈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
각 캐릭터들이 이랬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게 되는 점이 이 책의 매력인 것 같다. 제이 헌터가 마냥 대단한 존재도 착한 사람도 아니었지만 니스가 아버지의 선처를 바랐다면 제이는 받아들였을 것 같다. 왜냐면 제이의 행동에 대한 근간은 엄마의 불륜이고, 그를 알게 된 아버지의 압박이다. 하지만 끝내 엄마를 고발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제이가 니스의 아빠를 고발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결국 죄라는 것은 사실을 고백할 용기가 없는 것에서 시작되는 걸 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루미가 참 얄밉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루미 캐릭터가 내게 와닿지 않았던 이유는 레오가 평한 루미의 모습이 내게도 가장 눈에 보이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제이와 자기를 동일시 함으로 인해 지나치게 몰입하며 남에게 피해를 주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그 모습이 좀. 그래도 진실만은 찾을 수 있길 바랐는데 그 진실에 대한 집착이 엉뚱하게 다른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 비극인 것 같다.
이런 나도 차마 다윈은 옹호할 수 없는 것이, 왜 제목이 악의 기원인지 알 수 있었던 캐릭터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러너는 자기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을 죽였고, 니스는 아버지의 죄를 덮기 위해 죽였다.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이해할 만한 이유는 있었고 니스는 오랜 기간 뉘우치기도 했다. 근데 다윈은 진짜 소름 끼쳤다. 그동안 그렇게 니스의 죄를 밝혀 떳떳하게 해 주고 함께 뉘우쳐가려고 했던 모습은 어디 갔으며, 레오를 죽인 것도 모자라 아빠가 루미의 삼촌을 죽인 걸 알면서도 뻔뻔하게 다시 시작하다니... 정말 소름 끼치는 건, 레오를 죽인 그날 집으로 돌아가 파티를 즐겼을 거란 점이다. 앞으로도 탄탄대로를 걸어갈 그 삶을 충분히 즐길 것 같은 것도 그렇고.
죄가 쌓이다 보면 결국엔 악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 같았다.
책을 읽는 동안 재밌었고 특히 니스의 죄를 두고 고민하는 다윈의 걱정이 감정적이기만 한 게 아니라 꽤나 현실적인 부분도 많아서 나도 함께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좋았다. 그래서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 저자
- 박지리
- 출판
- 사계절
- 출판일
- 201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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